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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는 부푼 마음을 안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 먼저 대학에 진학한 고등학교 선배를 만나 이런 조언을 듣습니다.
‘너 입학하고 나서 절대로 과대 같은 거 하지 마라’
‘왜요?’
‘과대 진짜 힘들어. 일도 많고 뭐만 하면 사람들이 욕하고 MT도 다 가야 되고 장학금도 얼마 안 줘’
이 말을 듣고도 철수는 인원 많은 경영학과의 대표가 된다는 게 너무 멋있어 보여서 고민하다가 결국 남자 과대표에 자원합니다.
압도적 찬성표로 과대표 당선이 된 철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서 경영학과의 부흥을 일으키는 리더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처음에는 동기들의 지지를 받으니 ‘대학에 오니 참 좋은 친구들 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다음 날부터 할 일이 태산이었습니다. 매주 회의에 참여해야 하고 술자리에선 뺄 수 없이 잔을 들어야 하며, 어딜 가나 선배 동기들에게 주목을 받아야 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그룹을 이루어 벌써부터 수업을 같이 듣는데 늘 불려만 다니니 가까이 지낼 친구 만들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철수는 과잠을 맞추기 위해 단톡방에 디자인 수요조사 투표를 올렸습니다. 낼까지 빨리 과회장형한테 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현 오후 8시, 투표 안 한 사람만 태반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톡방에 말을 해도 투표 수가 거의 안 올라가자 결국 철수는 투표 안 한 사람 개개인에게 톡을 보냅니다. 그 중 학과에서 또라이 컨셉을 잡은 친구는 철수한테 이렇게 보냅니다.
‘야 이 시캬 형님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어딜 자꾸 귀찮게 하느냐’
톡을 본 철수는 분노가 머리 끝까지 올라왔지만, 화내면 소문이 안 좋아질 것 같아 이렇게 보냅니다.
‘오늘까지 내야해서 빨리 해야 돼’
이때 과회장 형의 톡이 날라옵니다.
‘철수야, 과잠 수요조사 다 됐지? 이따가 형이 일 끝나고 새벽에 바로 주문할 거라서 지금쯤 거의 다 됐어야 돼’
마음이 급한 철수는 이제 동기들에게 전화를 돌립니다.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거나 ‘왜?’라는 회신문자만 날라옵니다.
철수는 본인 말고는 과잠 수요조사에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대학 동기라는 인간관계를 돌아봅니다. 결국 철수는 혼자 기숙사에서 엉엉 울며 과대를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사람들 눈치가 보여 그것도 안된다는 현실에 과대에 자원했던 예전 자신의 모습을 후회합니다.
이 이야기는 성인이 된 후 리더를 처음 맡아보는 대부분의 어른이들이 겪는 현실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우울한 상황은 왜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철수는 고등학교의 인간관계와 대학교의 인간관계를 같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철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 과대라는 직책을 그저 ‘반장’ 정도로만 생각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반장은 어떨까요? 고등학교는 굉장히 폐쇄적인 공간입니다. 반 친구들이 함께 같은 과목의 수업을 듣고 늘 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이니 공지가 있으면 그냥 맨 앞에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전했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교는 개인적 성향이 강한 집단입니다. 본인이 원하는 과목을 원하는 시간대에 넣고 다같이 모일지 말지도 전부 개인의 선택이니 리더의 부담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고등학교는 ‘생활기록부’라는 본인의 좋은 모습을 저장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 반장을 맡게 되면 분명 수시지원할 때 좋은 영향을 받을 거라는 사실을 본인이 알고 있으며, 학부모들도 자신의 자녀가 반장을 맡으면 은근 자랑거리로 말한다는 사실도 학생 본인이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교는 어떨까요? 취업을 위한 생활기록부 따위는 없으며 성인이 되니 학부모들의 영향력은 사라집니다. 대신에 장학금 20만원 가량을 받긴 하지만, 총학생회에 속해 한 학기 150을 받는 동기 영희가 일의 양은 비슷한데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배가 아파오기도 합니다.
세번째는 일의 정갈함 차이입니다. 고등학교 땐 담임선생님이 학생의 입장에 맞추어 정갈하게 일을 정리한 후에 반장에게 내줍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맞추는 반잠은 선생님이 직접 디자인 수요조사를 하고 반 학생들이 선호하는 디자인 종류 몇 개를 분류한 후에 반장이 학생의 머릿수만 조사할 수 있게끔 일을 정갈하게 만들어놓습니다. 그러나 대학교에선 과잠을 맞출 때 교수와 과대 사이의 직접적인 컨택이 없고 오로지 선배와의 컨택이 있습니다. 선배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의 가이드를 후배에게 줄 뿐, 과잠 디자인을 조사하는 A부터 Z까지 전부 과의 몫입니다. 자칫하다가 텃새를 부리는 선배를 만나면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데도 이렇게까지 하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가장 큰 현타를 느끼는 차이는 바로 주변 친구들의 행동입니다. 고등학생 땐 친구들이 야자할 때 혹은 수업시간 중간에 담임선생님에게 불려가 틈틈이 일을 하니 자투리 시간에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대학교에선 과대가 일을 할 때 주변 친구들은 뭐하고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열심히 나 빼고 놀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종합적인 박탈감을 겪은 후 철수는 1년 전 선배가 말했던 것처럼 고등학교 후배에게 똑같이 말합니다. 역시 머릿속으로 왜 과대가 힘든지 정확히 정리가 잘 되지 않으니 ‘욕’, ‘일’, ‘장학금’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들만 말합니다. 듣는 후배도 과대라는 직책을 그저 고등학교 기준으로만 생각하니 역시 예전 철수처럼 크게 가슴에 와닿진 않습니다.
그럼 과대 철수는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할까요?
정답은 이렇습니다. 단톡방 공지의 첫 문장을 이렇게 적는 것입니다.
‘22학번 동기 여러분, 제가 첫 과대일을 하는 거다보니 요즘 많이 난처하고 힘듭니다. 이런 말은 정말 죄송하지만 투표 같은 거 있으면 최대한 빨리 해줄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신기하게도 이후로 투표율은 90% 이상으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이 문장은 두 가지를 알려줍니다. 첫 번째는 본인이 과대일을 하는 데 있어 힘듦을 느낀다는 감정을 사람들에게 처음 알린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공손한 말투를 통해 어른스러운 리더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동기들이 수요조사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성인이 되어서 리더의 직책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 본인이 투표를 안 하면 과대가 힘들어진다는 것을 잘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존심이 센 학생은 본인이 힘들다는 걸 딴 사람한테 티내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할 건 과잠조사를 적시에 처리하지 못할 시 더 큰 책임을 요구 받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벚꽃핀 건 오래 전인데 왜 이제서야 과잠을 주는 거지?’ 와 같은 말은 적대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새삼 리더란 자리가 참 많은 걸 요구하는 직책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존심이 너무 강한 건 인간관계에 좋은 영향을 주진 못합니다. 과대라는 직책을 맡을 때부터 후회를 하기보다는 남들보다 빨리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먼저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한 포인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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